<여자, 정혜>는 소통(communication)에 있어서의 관계(relationship)에 관한 영화이다.
정혜(김지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가량의 여자. 우체국에서 일하는데 직장 생활 4,5년차의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보면 특이한 점이 많은 성격의 소유자다. '오늘은 뭐 좀 새로운 걸 먹어 보자'는 동료에게 정혜는 '맨날 가던 데가 편하고 좋잖아'라고 응수한다. 이렇게 '변화'를 싫어하는 듯 보이는 그녀이지만 우체국에 오는 남자 고객에게 먼저 호감을 표시하는 면도 있다.
영화는 마치 보는 이가 바로 옆에서 주인공을 지켜보는 듯 진행된다. 정혜의 삶은 평범하다 못해 지루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그녀의 삶이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느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주인공은 바로 전 남편이다. 플래쉬 백은 그녀의 신혼 첫날 밤을 보여주는데 정혜는 특별한 이유없이(관객은 차차 그 이유를 알수 있게 된다) 남자곁을 떠나와서 결혼은 파기된다. 이 결혼을 중매한 고모는 정혜 모(母)에게(정혜 어머니는 죽었다는 것으로 초반부터 나온다)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며 그녀가 원래부터(어렸을때부터) 좀 이상한 면이 있었다고 푸념한다.
영화는 조금은 난해한 구성을 띄고 있다. 하지만 결국 정혜의 문제는 '근친상간'이었다는 것이 중간중간 삽입되는 컷들로 알수 있다. 정혜가 10대 중후반이었을 때 그녀의 고모부가 (경악스럽게도) 그녀를 겁탈했던 것이다. 그녀는 알려지는게 두려웠던지(그랬을 것이라 추측만 함) 이 사실을 숨기고 살다가 공교롭게도-또 불행히도- 어머니마저 지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이 사건은 영영 비밀(!)로 남게 된다. 그녀가 어머니에게조차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이해하기 힘든 점이다. 어쩌면 고모부(와 고모)가 어머니에게 대하여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알수가 없기에 영화는 불친절하게 보일 수도 있다.
정혜는 타인과 특별한 소통이 없이 살아간다. 물건은 홈쇼핑으로 구입하고 쉬는 날은 집에서 화초들을 돌보며 보내고, 어느날 주워온 고양이를 친구삼아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것은 어쩌면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삶이지 않을까? 자신의 특별한 이야기를 타인과 나누지 않은채도 우리는 잘 살 수 있다(적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카메라의 시선-는 정혜의 삶이 곧 뭔가 터질것처럼 위태위태하다고 말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홀로 호프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정혜. 근처에서 한 남자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그의 사정을 알게 된 그녀는 그를 데리고 여관에 간다.
얼핏 엿본 사람은 '그렇고 그런 일'이 벌어질거라 상상하겠지만 여태까지 영화에서 축적되어온 정혜의 생활을 안다면 이건 그다지 문란하다거나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실연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그 남자를 정혜는 위로한다. 아무 말 없이.(정말 아무 말이 없다!)
정혜는 속으로만 침잠한다. 영화에서 그녀와 관련된 남자들은 첫째는 고모부로 대변되는 폭력적인 남성이 있다. 신발 가게에서 필요이상으로 추근덕대는 남자직원에게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고모부와 관련된 감정이다. 하지만 그런 경험(성폭력)을 겪지않은 여성의 입장에서도 그 장면에선 정혜가 느낀 거북함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전해졌다.
또 하나는 한없이 애처로운 남자이다. 앞에서도 거론했던 여관방 장면의 남자에게 연민과 모성애를 느끼는 것은 또 다른 남성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두가지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정혜가 대쉬했던 남자를 통해서이다. 처음에는 그 남자 손님이 어머니와 같은 소설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에 단순히 매료되었을 지도 모른다.
영화는 결론을 향한다. 정혜는 언제까지 자신의 상처로 인해 고통받으며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살 것인가. 문제의 트라우마가 있었으므로 그 경험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우선임은 분명하다. 매미소리가 요란한 한여름날 정혜는 고모부를 찾아가고 죽일 결심을, 아니 죽이고자 한다. 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돌아오는 길, 넘어져 다친 그녀는 화장실에서 오열하는데 그게 통증때문인지 설움때문인지 알 수 없다.
정신이 들자 고양이 생각이 나서 바쁘게 집으로 달려왔을 때 그 소설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배우(황정민)의 호연덕에 기분좋은 엔딩이긴 하지만 이제 막 사랑의 감정이 싹튼 남자를 통해 과연 정혜의 전(全)삶이 회복되고 치유될 수 있을까?
삶-생명 <아는 여자>
<아는 여자>는 코믹한 영화이지만 삶(life)으로서의 생명(life)에 관한 이야기가 영화의 주된 모티브이다.
2군 야구선수 동치성(정재영)은 애인에게 차이고 병원에서도 악성 종양 말기라는 선고를 받는다. 내
레이션은 동치성의 삶을 코믹하게 보여주지만 죽음의 그림자는 영화의 진행과 함께 한다. 죽음을 앞
두고 있는 그에게 불쑥 한 여자가 등장한다. 웃지 못할 일로 인연을 맺게 되는데 치성은 그녀가 싫지
많은 않다. 
영화에서 동치성은 극적인 일을 겪는 순간마다 상대에게 '사랑이 뭔지 아냐'고 묻는다. 집 담보로 대
출받으러 간 은행에서 강도들앞에서 또 집에 침입해온 도둑에게도. 그런데 의외로 그런 이들에게 듣
는 대답이 (동치성에게도 관객에게도) 진실되게 다가온다. '그래서 내가 그랬죠. 사랑, 사랑이 뭐 별
거냐. 여자 만났다. 이름부터 물어보고. 이름 알면 그 이름을 가진 그 여자를 사랑하는 거고, 그 다
음에 나이 물어보고. 그 다음에 좋아하는 음식...' "저요, 사랑에 대해 잘은 몰라요. 근데, 사랑하면
요, 그냥 사랑 아닙니까? 무슨 사랑, 어떤 사랑, 그런게 어디 있나요? 그냥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죠.
도둑이라 잘은 몰라요."
알고보니 치성이 아는 그 여자는 자기와 똑같은 운명을 갖고 있었다. 동네 주민 단체 여행때 비행기
사고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것이다. 같은 일을 겪었기에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연(이나영)
과 심각하지 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이나영은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 이어 불치병을 앓는 연인을 둔 주인공 역을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다. (사실 반전이 곧 펼쳐지지만) 
졸지에 도둑(장물애비)으로 몰려 사정상 이연의 집에 머물게 된 치성. 야구중계를 보다가 무심코 이
연에게(여기까지 이연은 '아는 여자'일뿐 이름이 나오진 않음) 묻는다. 두 달후에 죽는다면 뭘 하겠
느냐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연은 어쩌면 너무도 옳은 말을 한다. 꼭 두 달이어야 하냐고, 그 두 달을
어떻게 참고 견디냐고. 치성은 공감한다.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에선 매일매일이 똑같이 되풀이되자 질린 주인공이 자
살을 시도하는데 동치성도 죽기로 결심한다. 조금 독특하게 마라톤(풀코스)을 선택하는데 엉뚱하게
도 입상만 해서 이연은 선물로 김치냉장고를 받고 좋아 한다. 물론 영화의 스타일은 조금은 엉뚱하
고 그래서 일부는 이 영화를 허무맹랑한 코메디쯤으로 치부하고 마는 것도 같다. 하지만 어두운-죽
음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경쾌하게 슥, 아무것도 아닌 듯 하는 영화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
런(톡톡튀는) 대표적인 장면으로 도둑의 에피소드가 있다. 전번에 치성의 집에 들어왔다가 오히려
'따스하신 배려'만 받고 돌아갔던 도둑이 다시 이연과 치성의 집에 왔다. 왜 또 왔냐는 호통에 '삶이
저를 가둡니다'라며 자신도 떳떳이 살려고 했지만 아내가 셋째(애)를 가졌다며....
주사가 없고 첫사랑이 없고 내년이 없던 동치성에겐 세상에서 이제(!) 두려울 게 없었다. 그래서 도
둑을 대신해 취조실에도 끌려가지만 결국 풀려난다. 야구장에서 그는 무모한 짓(!)을 한다. 투수인
그가 땅볼로 잡은 볼을 1루가 아니라 관중석으로 던지는 것. 허공으로! 그건 그가 '아는 여자' 이연
이 '재밌겠다'며 무심코 제안(?)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야 할 이 장면에서 본인
이 야구에 문외한이어서인지 그렇지 못했던게 아쉽다. 아무튼 우리의 아는 여자 이연에겐 그 무엇보
다 근사한 프러포즈(아니 사랑에 대한 확답!)였을 것이다. '내가 살아서 던지는 마지막 공이다. 오늘
의 내 모습을 내가 아는 여자도 날 아는 다른 모두도 잊지 못할 것이다... 모두 안녕.' - 치성의 (가
슴속) 대사.
영화는 이쯤에서 사실을 밝힌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치성이 의사의 전갈이 있는 쪽지를 보게 되
는 되는데 오(誤)진단이었다는 것이다. 돌팔이 때문에 '집도 날아가고, 볼도 날아간' 치성이 제정신
일 리가 없다. 전화를 받고 바(bar)로 간 이연은 잔뜩 취한 치성에게 한바탕 주사를 들어야 했다.
영화는 한번더 마지막으로 판타지를 보여주는데 치성이 밤 도로에서 차에 치이는 여자를 보는 장면
이다. 현실인지 뭔지 모를 그 순간 둘은 대화를 나누는데, 그 여자는 애증으로 연인을 죽이고 자기도
죽고자 했다. 여자는 치성에게 말을 건넨다. '사랑하다 죽으면 꿈을 이루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
나 봐요. 사랑은 살아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건가봐요'라고. 몽환적이긴 하지만, 죽음에서 갑자기
생(生)으로 바뀐 치성에게 느껴지는 어떤 텔레파시였으리라.
깨달음을 확 느낀 치성은 막 달려간다. 무작정 뛰면서 그간의, 영락없이 자기가 두달후 죽을줄 알고
살았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그는 사랑을 '실천'한다. 이연에게 여태껏 몰랐
던 이름이 뭔지도 물어보고 취미, 혈액형 따위도 물어본다. 남들처럼...
<여자, 정혜>와 <아는 여자>는 전혀 다른 영화이긴 하지만 끝 장면이 모두 새로운 희망적인 만남-
연애라는-이라는 점이 같다. <여자, 정혜>는 여성의 시각이 영화의 시점이고 <아는 여자>는 남자의
시각이라는 점 정도가 다르달까? 흥미롭게도 모두 여자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고 감독이 남자라
는 점은 이채롭다.




덧글
배트맨 2009/05/03 01:58 # 답글
마이 목록에서 루시님의 새로운 글이 포스팅 된 것을 보니 반갑네요. 잠자리에 들려다가 마지막으로 루시님 얼음집에 마실을 와서 읽어봤습니다. <여자, 정혜>를 보지는 않았지만 꽤 호평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케이블TV로 풀리게 되면 챙겨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루시님의 리뷰로 대신했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는 여자>는 극장에서 미친듯이 웃어가며 봤었습니다. 장진 감독이 확실히 코미디 장르에는 재능을 보이는 것 같아요. 다른 장르로 한눈을 팔아서 문제지만요. -_-a
마음 추스리시고 계신가요.. 힘 내시고요. 식사 제때 꼭 하세요.. 저는 지난 주중에 친구 부친상에 다녀왔네요. 오늘은 아침 일찍 할머니를 만나러 갑니다..
루시 2009/05/06 10:48 #
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는 여자를 미친듯이 보셨다,라 너무 부러워요...........재개봉...하면 좋겠..ㅠㅠ
아... 친구 부친상....너무 슬퍼요~~
-와 댓글 기능 신기 -
배트맨 2009/05/07 21:57 #
다시 이곳에서 블로깅을 시작하셔서 기쁩니다.얼음집에 적응이 좀 되시면, 이곳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
(저 왔을 때만 하더라도 얼음집에는 댓글 기능이 없었는데, 확실히 편하기는 합니다.)
CrysTal 2009/05/22 08:30 # 답글
3년전 봄 집에서 아는여자 DVD를 보면서 서러움에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지금 다시봐도 짠할듯 합니다. ;ㅅ;)/